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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1. 16. 00:00<창세기 29:16~30 ①> 야곱의 사랑 속에 감추어진 자기애와 집착
성경말씀 : 창세기 29:16~30 |
16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말씀묵상 |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늘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속성을 지닌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그 사랑에 변질이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랑이 표면적으로는 아릅답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타락된 본성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어떻게 7년 아니 14년이라는 긴긴 시간이 수일처럼 지나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으로 인해 시간의 흐름조차 단축케 하니 사랑이 위대하다고 보겠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시간조차 무색할 정도로 철저한 자기 집착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하나의 목적을 향한 지독한 집념이 흔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 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지독한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으로 삽니까?
인간은 타인으로 삽니다.
인간은 대상체를 만남으로 비로소 자기 존재의 가치를 파악하는 겁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인간은 혼자가 되면 못견딥니다. "왜 내가 혼자가 되면 외롭고 괴로운가? 그 이유와 원인이 무엇인가?" 를 따지지 않고 "나는 결코 혼자 있지 않을거야" 라고 외쳐대는 것이 인간입니다.
흔히 혼자 사는 사람 곁에는 개나 고양이나 금붕어 같은 애완용 동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중얼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어떤 대상을 향해 말을 던지고 관계를 맺음으로서 그 쪽의 반응을 보고 자기의 가치를 얻고자 하는 존재입니다.
사랑이란 딴 게 아니라 어떤 대상에게 말이나 행위를 보내어서 거기서 보내오는 반응에 매달리는 집착을 뜻하는 겁니다.
즉 사람이란 사랑의 대상이 없이는 현재 자신의 살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왜 이렇게 된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짝지어준 그 짝을 에덴동산의 범죄로 인하여 상실해 버리고 남은 것은 오직 자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되지 못하고 '나'가 되어 버린 상태에서 인간적인 힘으로 '우리'를 찾아나서야 된다는 본능 때문에 사랑이 생겨나는 겁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에덴에서 완전했던 ‘우리’를 찾으려 하다 보니 아름답고 잘난 이성을 찾아가고 좋아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인간의 유전자 속에 입력되어 버린 것입니다.
원래 아담 하와가 하나였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온전한 아름다움이 있듯이 아담과 하와는 개체 따로따로 아름답다기보다는 ‘우리’라는 존재 양식으로 아름다왔고 존재 가치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있어야만 자신의 존재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니 온전한 우리는 분리가 되어 너와 내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에덴에서 가지고 있었던 온전한 하나로서의 ‘우리’ 에 대한 정보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홀로는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에서의 우리의 존재가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렀기에 인간의 방법과 힘으로 그 존재가치를 채우려고 하다 보니 더 아름답고 잘난 상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타락한 인간의 DNA 속에는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높이기 위해 더 아름답고 잘난 상대를 찾아가게 만드는 요인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동생 라헬을 사랑하고 언니 레아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왜 이런 태도를 나타냅니까?
17절에 보니,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헬이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훨씬 아름다왔다는 것입니다.
야곱도 타락한 인간의 유전자속에 내포 되어 있는 인간 본성의 차원을 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보다 예쁜 라헬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그 여인과 하나 되는 것이 못생긴 여인과 하나 되는 것보다 더 우수한 자신의 존재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유전자의 정보 때문입니다.
그런데 14년이란 긴 세월을 라헬을 위해 너무 쉽게 기다렸다는 것은 야곱 스스로도 알지 못했겠지만 라헬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이려는 본성이 매우 강렬하게 작동했던 것입니다.
그 사랑 속에 감추어진 자기애와 자기집착의 성향이 누구보다 야곱이 강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유전자 속에 그 누구보다도 강한 타락한 본성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신자라면 신자답게 뭔가 실생활에서도 불신자와 차이나는 면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야곱을 보면 신자도 불신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야곱이 사랑하는 것, 야곱이 하고 싶은 것은 일단 다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야곱의 라헬을 통한 자기 사랑이 방해를 받게 함으로써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자신의 내면에 깊이 감추어진 자기애와 자기집착을 서서히 버리게끔 하십니다.
이것이 야곱을 다루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모두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지만 결국에는 온갖 방해와 장애물을 등장시켜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에 공력을 들이는가 하는 점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자아를 하나 하나 꺽어 가시는 것입니다.
기 도 |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일 가운데서 자기애와 자기집착이 동기가 되지 않았는지를
늘 살피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29:1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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