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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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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2. 11. 00:00

<창세기 34:13~29> 신앙을 수단으로 삼을 때의 위험성

 

 성경말씀 : 창세기 34:13~29

 

13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14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15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18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19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 

20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21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22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23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24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말씀묵상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의 강간사건을 디나 한 개인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수치로 여겼습니다.

이 의식자체는 분명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메세지에는 관심이 없고  집안과 종족과 종교적 자존심을 건드린데 대한 증오와 분노만이 그들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우리 주변에서 집단간의 문제가 확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문이나 민족의 선민의식과 자존심을 내 세워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타 집단을 배척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한 개인 간의 문제처럼 보이는 이 사건이 어떻게 종족간의 싸움과 종교적인 문제로 번지게 되는가를 지켜보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는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많은 전쟁의 역사가 민족과 종교의 우월성에서 오는 집단적 자존감에 기인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독교마저도 이런 집단적 자존심과 세력화를 위해 벌였던 명분없는 전쟁이 역사가운데 많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슬람지역이 기독교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된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제는 기독교라는 집단에 소속된 자존심과 정치적 세력화를 위해서 벌인 노력들이 오히려 반대 집단의 반발과 적대감만 낳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8-21;신32:25)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는 항상 무모함에서 시작되며 결국 후회로 끝납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죄를 더할 뿐, 결코 악을 이길 수 없으며 오히려 더 큰 악을 불러올 뿐입니다.

복수를 한다는 것이 서로 더 깊은 원수가 되는 것에 불과하기에, 오히려 복수하지 않을 때 진정 이기는 자가 됩니다.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치부당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자존심이 무엇인가를 아는 이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대항하여  정치적으로 세력화한다든지 군사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선으로 악을 이겨 로마제국을 복음화 시켰습니다.  

 

기독교가 집단화 되거나 세력화 될때 복음은 오히려 집단 내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높이는 수단으로서 이용되며 복음의 의미가 퇴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진실한 종교가 아닌 물질 축복과 집단의 자존심과 수치심만을 강조하는 위장된 종교의 참상이 무엇인가가 증언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왕에게 “할례”를 디나와의 결혼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는 세겜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거동이 불편한 틈을 타서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살육하고 여자와 재물을 노략질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거룩한 할례의식을 자신들의 피비리내 나는 복수극을 위해 이용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옛 자아를  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통치함을 받고 살겠음을 인치는 언약의식입니다.

따라서 할례를 행할때에는 수례자에게 그 의미를 설명하고 확인하는 작업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의 신앙적 의미와 정신은 전혀 가르쳐주지 않은 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에게만 주는 할례를 세겜의 이방인에게 시행케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의식을 자기들의 사악한 계획을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개인과 집단이 당한 수치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막상 정말 중요하게 지키고 명심해야 할 할례가 지닌 거룩한 표징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이것이 성경과 역사 속에서 종교 집단과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가지는 위험성으로 끊임없이 경고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종교적 의식이 담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보다는 그 형식에 치우치는 경향이 강합니다.

신앙인이라는 자부심과 자신들의 이익 성취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의미를 생각하며 살아가고자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세겜과 하몰도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만 성취되면 그만이었기에 깊이 이 문제를 생각해보지도 않고 쾌히 수락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백성들도 설득하여 함께 할례를 받게 합니다.

 

저들은 “할례”를 단지 “한 민족”이 되는 통과의례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34:23).

재산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힌 저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익만을 강조합니다.

 

비록 세겜이 할례를 받았지만, 온전한 언약체결적인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20-22절에서 하몰과 세겜에 백성을 설득하는 내용을 보면 언약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언약에 대한 문제는 없고 이스라엘과 연합하면 우리의 힘과 재산이 그만큼 더 커지지 않겠느냐는 것이 설득의 내용이었습니다.

 

할례를 요구한쪽이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나 모두가 할례를 통한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옛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복음의 본질적 의미는 희석되고 자신이 옛 자아가 주장하는 목표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내용만이 강조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의 본질인 죄와 구속 그리고 죄와의 싸움에 관한 얘기는 외곽으로 비껴둔 채 이 땅에서 누리는 가시적인 복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할때에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죄와 구속이라는 원색적인 십자가 복음을 바로 전하지 못하고 인생의 행복을 위한 담론으로 복음을 희석시켜 전합니다.

 

기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과 회심 체험으로 신앙이 시작되지 아니하고 지금 나의 삶보다 더 나아지고 행복해질 인생을 위한 수단으로서 신앙의 출발점을 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룩한 할례의식이 인간의 분노와 탐욕으로 더럽혀진 본문의 사건이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기     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나의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4: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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