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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2. 28. 00:00<창세기 37:2~5> 요셉의 생애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성경말씀 : 창세기 37:2~5 |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말씀묵상 |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셉의 생애는 아브라함에게서 계승되어온 야곱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지는 삶을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언약의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계시였습니다.
결국 요셉의 생애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을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마치 소설에서 복선을 깔듯이 요셉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에 앞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할 것임을 암시하는 몇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첫번째로, 2절을 보면 요셉이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함께’ 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트’라는 전치사는 목적어를 유도하며 ‘~안에서’ 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에트’ 가 ‘~안에서’ 의 용법으로 쓰이면 요셉이 ‘양떼들 안에서 그의 형들을 돌보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사실 나이가 어린 요셉이 어떻게 형들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
이 표현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요셉이 형들과 함께 양떼를 돌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형들을 돌보는 위치에 있게 될 요셉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고 2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표현을 동양의 문화에서 바라본다면 고자질 잘 하는 치사한 요셉으로 비추어집니다.
그런데 이 표현의 원문상의 의미는 ‘요셉이 형들의 나쁜 문제들을 가지고 왔다’ 입니다.
여기서 나쁘다는 것은 양치는데 있어서의 실수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악한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야곱 아들들의 행위를 미루어 보건대 충분히 짐작이 가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의 악행에 동참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하며 그 문제들을 아버지께 가져 온 것입니다.
이것은 고자질 하는 요셉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의로운 요셉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신앙의 맥이 요셉을 통해 회복되고 이어질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3절에서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원문상 ‘노년에 낳은 아들’ 이란 표현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에도 동일하게 쓰였습니다. (창21:2,7).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약속의 상속자인 이삭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은 “노년에 네가 아들을 낳았도다” 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나이 들어 낳은 자식이기에 사랑을 했다면 야곱은 모든 자식을 모두 사랑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84세가 넘은 나이에 르우벤을 낳기 시작한 후 7년 째에 요셉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11명의 아들들 모두 나이들어 낳은 자식들입니다.
오히려 단순히 나이 들어 낳은 자식을 편애했다면 베냐민이 거기에 해당하는 아들입니다.
베냐민은 요셉을 낳은 후 16년이나 지난 후 낳은 가장 노년 때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베냐민은 요셉과 같은 라헬의 소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에 여러 아들들 보다 요셉을 사랑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보다 약속의 상속자인 이삭을 사랑한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즉 성경은 요셉이 야곱의 약속된 상속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채색옷은 그 당시에 상속자에게 입히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마음속에 실제로 요셉을 상속자로 지정하고 그 당시의 관행에 따라 그에게 채색옷을 입혔는지 아니면 너무 요셉을 편애 했기에 그저 최상의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싶어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라고 기록된 것은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의 의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즉 요셉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상속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에 있어서는 성경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지칭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요.
따라서 이 본문에서 편애한다는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쓰인 것이 아닙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버리고 이삭을 사랑하고 선택한 것과 같은 선상에서 생각해야 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이 본문은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가는 장자의 축복은 유다에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야곱의 언약을 이어가는 진전한 약속의 상속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요셉의 생애가 야곱 언약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이제 본문은 야곱의 편애로 인해 요셉을 미워하는 다른 형제들을 보도합니다.
분명히 자식을 편애하는 것은 나쁜 일이며 그것으로 인해 형제들간에 미움과 다툼이 생긴 것은 사실 야곱 가정사의 수치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수치스런 야곱의 가정사를 구속의 진리를 설명하는 하나의 그림으로 사용하십니다.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은 영적인 원리상 이삭이 약속의 상속자였기에 이스마엘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하나님께 제사의 열납을 받은 아벨을 질투하고 미워하여 동생을 죽인 가인의 사건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는 일에는 늘 핍박과 질시가 따릅니다.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은 늘 외롭기 마련입니다.
요셉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나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그가 약속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 본문이 보여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우기 요셉이 꿈을 얘기한 후 더욱 미움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꿈은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한 방편이엇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요셉이 철이 없고 순진해서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을 그림으로 그려 하나님의 계시를 대적하는 무리들 궁극에는 그 계시의 총체인 예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세력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림의 중심에 요셉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37장 초두에서 요셉이 약속의 상속자로서 예수님을 설명하는 삶을 살아 갈 것이라고 암시하며 복선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큐티 데이를 시작하면서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적용은 큐티의 중요한 요소일 뿐, 큐티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살의 구체적인 적용거리를 끄집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을 묵상하면서 인류를 향한, 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럴 때에 내 앞에 닥친 일상의 문제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지며 우리 주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우러러 나올 것입니다.
기 도 |
요셉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깊이 생각하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7: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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