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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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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창세기 2017. 3. 10. 00:00

<창세기 38:2~11 (1)> 계대결혼에 담긴 의미

 

 성경말씀 : 창세기 38:2~11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말씀묵상

 

유다가 아둘람 땅 히라에게로 내려온 이후 그의 행로에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한번 내려가는 것이 어렵지 일단 내려막 길을 타기 시작하면 그 발걸음은 걷잡을 수 없어지게 됩니다.

 

보십시요 지금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혼인하고 그 사이에서 세 명의 아들들을 갖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그의 행동은 거리낌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지시킨 것은 영적인 의미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모세는 이방인 가운데서 아내를 들입니다. 

다만 가나안 족속은 이방인 가운데서도 유달리 성적으로 문란한 민족이었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나안족속과의 혼인을 금지 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족과의 혼인은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죽하면 에서도 가나안 여인과 자기 마음대로 혼인은 하였지만 부모의 눈치를 보며 그래도 혈족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이스마엘의 딸을 다시 아내로 맞아 들였겠습니까?

 

이렇게 타락해 가는 유다와 그 가정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건이 장자 엘의 죽음입니다.

성경은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으로 그를 죽이셨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가져올 만한 악한 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엘의 죽음을 말하면서 엘 앞에 유다의 장자란 수식어를 붙입니다.

장자란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받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인 유다의 기업이 무엇이었습니까?

유다가 가나안에 내려와서 쌓아 놓은 기업이라고는 하나님을 떠난  불경건한 삶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엘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그 근원이 아버지인 유다에게 있었음을 말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타락한 유다의 가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가도록 섭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측량 못할 하나님의 지혜를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장자인 엘이 죽은 후 유다는  둘째인 오난에게 형수에게 들어가 아이를 낳게 하여 그 아이로 하여금 장자 엘의 대를 이어가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계대결혼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계대결혼은 가문의 대를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고대 중근동 사회의 관습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관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행케 함으로써 이 결혼법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창세기 3:15에서 아담에게 약속하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그들의 구원자, 여인의 후손이 오실 때까지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혈통적 대를 이어간다는 개념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계대결혼을 통해 장자의 대를 이어가는 것은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영광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에서 자녀를 여호와의 기업이나 상급이라고 표현하며 자식이 끊기는 것을 저주로 표현한 것은 대를 이어가는 행위 안에 이러한 영적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의 기업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자녀의 유무에 상관없이 기뻐해야 할 이유는 우리 모두는 여호와의 기업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후손에 대한 약속을 들어온 야곱 집안 사람들에게,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사상은 자연적으로 마음에 스며든 가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다가 계대결혼을 시행하는 것은 그 당시 사회의 관습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야곱가문에 전수되어 내려온 장자권에 대한 의식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둘째아들 오난은 유다의 명을 받아 형수에게 들어가 관계는 하되 자신의 정액을 형수의 몸 밖에 배설합니다.

이 행동은 여호와께 죽임을 당할 만큼 악한 행위였습니다.

단순히 체외설정을 한 물리적 행동에 죄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한 오난의 마음가짐 때문입니다.

오난은 형수와의 성관계는 즐기면서 정작 그 행위의 본질인 형의 후손을 낳아 대를 이어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형의 자녀를 낳아주면 자신에게 돌아올 상속이 적어질텐데 그렇게 손해 보면서까지 대를 잇게 하고 싶지는 않았더 것입니다.

그는 계대결혼에 담겨 있는 장자 후손의 계승정신을 애써 외면하였습니다. 

오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을 등한시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오난의 경솔한 행동은 그로 하여금 구속의 역사에 동참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난의 죽음을 통해 구원을 등한시 여기는 사람들이 당할 영원한 사망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난은 자신의 행동이 여호와 앞에 죽임을 당할 정도로 그렇게 큰 죄악이란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거나 구원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손해보기 싫어하는 사소한 것에서 주를 대적하는 일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다가 오난에게 이 사실을 확실히 말해 주지 않음으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아들이 죽은 것을 며느리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보면 유다가 계대결혼에 대한 영적 의미를 분명히 전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에 복음의 표피만 전하지 말고 심층부에 있는 핵심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표면적인 그리스도인만이 양산되어 하나님으 영광이 가리우게 됩니다.

또한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받아들인 사람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구원에 동참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     도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귀중함을 알게 하소서

 

 내일말씀 : 창세기 3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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