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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출애굽기 2017. 7. 13. 00:00<출애굽기 10:21~29> 십자가는 빛과 어둠움을 분명히 갈라 놓습니다.
성경말씀 : 출애굽기 10:21~29 |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3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25 모세가 이르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26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27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28 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29 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말씀묵상 |
애굽인들의 가장 큰 신은 태양입니다. 태양을 ‘라(Ra)’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태양의 아들이 바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흑암의 재앙을 내려 3일 동안이나 캄캄한 어두움이 몰려와서는 손을 더듬어야 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인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과 공포였겠습니까?
자신들이 섬기는 최고의 신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자 바로가 모세에게 너희 모든 사람들이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양과 소는 머물러 두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제안한 순서를 보자면,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8:25절)
“광야애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마라” (8:28절)
“너희 남정만 가라” (10:11절)
“너희 모든 사람은 가되 소와 양은 남겨두라고 합니다” (10:24절)
이러한 바로의 제안에서 점점 교묘해지는 사단의 술책과 우리 신앙의 타협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러 가는데 꼭 멀리 3일길이나 광야로 가서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꼭 세상에서 그렇게 구별 나게 해야 되겠는가?
성도가 함께 모여 주를 찬양함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과연 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배보다 다른 일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면 아직 애굽 안에 있으라는 말에 타협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제사를 드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왜요? 너무 멀리 가면 갔다가 돌아올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을 떠난 듯 하지만 또 세상 속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직도 너무 세상과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멀리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세와 가치관이 아직 세상에서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언제는 포기한 듯이 보이지만 어느새 또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어린이들이 남고 어른들만 가면 그것은 절반의 떠남입니다.
자신의 혈육이 남아 있는데 제대로 떠난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짐승은 남겨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사람만 모두 빠져나가도 감사한 일인데 바로와 싸워가면서 굳이 짐승을 모두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까?
물론 제사용으로 짐승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짐승을 가져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면 우리의 소유도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소유는 또다시 나의 것으로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뒷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 건강, 재능, 재물, 명예...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진정 생각하십니까?
정말 우리의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우리는 네 번째의 제안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이 성도에게는 무엇으로 보여야 합니까?
어두움으로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들어온 성도의 시각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기대를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바른 신앙양심을 가지고서는 하루도 살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살려고 하니 세상이 어두움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자꾸만 세상이 밝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조명을 받지 않으면 세상이 그래도 선하고 아름다움이 있으며 희망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 주위에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얘기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엔 악한 사람도 많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도 많이 있어 살아갈 만한 곳이라고 말이죠.
이게 보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애굽이나 바벨론 제국을 멸망받을 어두움의 세력으로 치부하고 우리도 성경을 보면서는 애굽이나 바베론이 악의 제국같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애굽이나 바벨론 제국의 사회생활상을 그린 문헌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 주위와 같이 인간미 넘치고 훈훈하며 가슴에 감동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얘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한 마디로 그곳들을 흑암의 세력이라고 평가합니다.
우리가 현실세계에 살아가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강력하게 받으며 우리의 삶을 조명받지 못하면 우리가 어둠에 처해 있는지를 도무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우리가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보는 경우는 흉악법죄나 비리 사건등이 뉴스의 기사을 얼룩지게 할 때 정도입니다.
그래서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냐 못하느냐를 결정지어 주는 좋은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볼때 그곳에서 캄캄한 흑암이 바라보인다면 내가 광명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빛에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오히려 인터넷에 떠도는 감동적인 얘기에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세상은 오늘도 무어라고 합니까?
비록 어려운 문제들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 풀지 못하는 것은 없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세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 많다고 하여도 그러나 착한 사람이 더 많다.
어려움이 있어도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이러고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라면 이 세상이 어두움으로 캄캄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곳에서 살수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로 나누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우리에게 빛과 어두움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줍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지 아니하고는 세상이 절대로 어둠움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어두움이라고 보지 않고 자기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어려움과 고통을 어두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없는 것이 캄캄함이요 어두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없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들로 사람들이 환호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십자가로 보면 모두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거대한 나라,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위대한 왕과 지혜로운 관리자들에 의하여 움직여지기 때문에 나라들마다 애굽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어둠의 나라였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니 여지없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흑암의 재앙은 나름대로의 빛이 있어 밝게 보이는 애굽이 전혀 그렇지 않으며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움의 왕국임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기 도 |
이 세상이 흑암이라는 것을 진정 깨달을 수 있는 영안을 주시고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어둠의 영역에서 빛의 영역으로
우리의 삶이 옮겨졌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내일말씀 : 출애굽기 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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