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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니이다 (시편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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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출애굽기 2018. 1. 9. 00:00

<출애굽기 36:8~38 (3)> 외관이 초라한 기독교

 

 성경말씀 : 출애굽기 35:8~38

  8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열 폭 휘장으로 성막을 지었으니

      곧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들을 무늬 놓아 짜서 지은 것이라 

  9  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10  그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그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11  연결할 끝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결할 끝폭 가에도 고를 만들되 

12  그 연결할 한 폭에 고리 쉰 개를 달고 다른 연결할 한 폭의 가에도 고리 쉰 개를 달아

      그 고들이 서로 대하게 하고 

13  금 갈고리 쉰 개를 만들어 그 갈고리로 두 휘장을 연결하여 한 막을 이루었더라 

14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 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었으니 

15  각 폭의 길이는 서른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열한 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16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17  휘장을 연결할 끝폭 가에 고리 쉰 개를 달며 다른 연결할 끝폭 가에도 고리 쉰 개를 달고 

18  놋 갈고리 쉰 개를 만들어 그 휘장을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었더라 

20  그가 또 조각목으로 성막에 세울 널판들을 만들었으니 

21  각 판의 길이는 열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반이며 

22  각 판에 두 촉이 있어 서로 연결하게 하였으니 성막의 모든 판이 그러하며 

23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었으되 남으로는 남쪽에 널판이 스무 개라 

24  그 스무 개 널판 밑에 은 받침 마흔 개를 만들었으되

      곧 이 널판 밑에도 두 받침이 그 두 촉을 받게 하였고

      저 널판 밑에도 두 받침이 그 두 촉을 받게 하였으며 

25  성막 다른 쪽 곧 북쪽을 위하여도 널판 스무 개를 만들고 

26  또 은 받침 마흔 개를 만들었으니 곧 이 판 밑에도 받침이 둘이요 저 판 밑에도 받침이 둘이며 

27  장막 뒤 곧 서쪽을 위하여는 널판 여섯 개를 만들었고 

28  장막 뒤 두 모퉁이 편을 위하여는 널판 두 개를 만들되 

29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각기 두 겹 두께로 하여 윗고리에 이르게 하고

      두 모퉁이 쪽을 다 그리하며 

30  그 널판은 여덟 개요 그 받침은 은 받침 열여섯 개라 각 널판 밑에 두 개씩이었더라 

31  그가 또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었으니 곧 성막 이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32  성막 저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뒤 곧 서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며 

33  그 중간 띠를 만들되 널판 중간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였으며 

34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에 띠를 꿸 금 고리를 만들고 그 띠도 금으로 쌌더라 

35  그가 또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휘장을 짜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고 

36  조각목으로 네 기둥을 만들어 금으로 쌌으며

      그 갈고리는 금으로 기둥의 네 받침은 은으로 부어 만들었으며 

37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장막 문을 위하여 휘장을 만들고 

38  휘장 문의 기둥 다섯과 그 갈고리를 만들고 기둥 머리와 그 가름대를 금으로 쌌으며

      그 다섯 받침은 놋이었더라 

 

 말씀묵상

이제 하나님이 주신 식양에 따라 기술자들은 성막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에 성막 외관의 제작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더 살펴볼 내용들도 많이 있지만 대략적인 것은 식양의 내용에서 한번 다루었기에  큰 틀 안에서만 간략하게 그 외관이 주는 이미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성막 외관이 주는 이미지가 결코 화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보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드러난 주님의 모습은 이 세상이 흠모하거나 존경할 만한 아무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였습니다.

주님께서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학벌을 가지고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면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라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은 또한 기독교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기독교가 결코 외형적으로 화려하고 거대하며 강한 것을 보여줌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외적인 화려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모든 면에서 불신자 보다 잘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 문화는 전파되고 기독교라는 종교의 영향력은 증대될지언정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보화가 금그릇 속에 담겨 있을 때보다도 질그릇 속에 담겨 있을 때 그 진가는 더욱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양이 초라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진다구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보화가 담아 있지 않기에 외양을 더 화려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속이 빈 사람일수록 외모에 신경을 더 쓰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6-29)


둘째, 성막은 이동형 텐트라는 것입니다.

텐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소부재 하심을 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 가든지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은 인도와 보호라는 측면도 있지만 코람데오 즉 어디 있든지 하나님 면전이란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막은 이동형 신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동형 신전이 이방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일상의 삶에서 자신들과 늘 함께 한다는 것은 인간이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세계의 신전은 한 곳에 고정되었습니다.

그 거대하고 화려한 신전에 그들의 신을 모셔 놓습니다.

그러면 일 년에 몇 번 신전에 가서 신에게 정성껏 제의를 지내는 것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성을 다하여 그 의무만 마치면 신전 밖에서 삶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고정된 신전 안에 신을 모시는 것은 인간의 욕망 안에 신을 가두어 놓는 행위입니다.

신은 한 곳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후에 이스라엘도 이동형 성막에서 고정형의 솔로몬 성전을 짓게 됩니다.

그 외관이 화려해지기는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는 우를 범했습니다. 

그들의 사고가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분으로 고착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기만 계시는 것인 양 예배는 거창하게 드리는데 성전을 벗어난 후  실제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은 엉터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은 가증히 여기셨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누가 이 성전의 문을 좀 막아서 이런 거짓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여전히 이러한 모습들이 보이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하나님 면전의식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하나님이 지금 내 삶과 늘 동행하심에 대한 의식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동하는 텐트 가운데 계십니다.

 

 기     도 

질그릇 가운데 보화를 지닌 자들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 면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내일말씀 : 출애굽기 37: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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